요시다 전차 – 그림과 언어의 융합, 궁극의 넌센스를 추구하는 고독한 작가

Comedy

그러고 보니 만화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다. 전투, 스포츠, 요리, SF, 로맨스까지…. 지금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한 종류의 만화가 탄생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왔다. 필자 역시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좋아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만화가들을 이 블로그에서 소개해왔다. 그러던 중 문득 의문이 생긴 적이 있다.

“그렇다면 가장 오래된 만화의 [장르]는 도대체 무엇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 답을 알기 위해서는 ‘만화’라는 표현 방식 자체의 발생 기원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종이에 캐릭터를 그려넣고, 말풍선을 달아 대화하게 하는 만화라는 오락. 이 표현 방식은 현대의 우리에게는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당연하기는커녕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즉, ‘발화자 자신이 없는데도 그 발화가 들린다’는 개념과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악보나 담화 기록 등은 물론 있었지만, 이는 발생된 음향 자체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1890년대 미국에서는 축음기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정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자 한 신문 잡지에서 지금까지의 표현 기법을 뒤엎는 작품이 탄생했다.

1896년 10월 25일 『뉴욕 저널』에 실린 R. F. 아웃코트(R. F. Outcourt)의 만화 ‘옐로우 키드와 새로운 축음기’가 그것이다. 이 만화는 소년이 축음기를 소개하고 음성을 들려주었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실 앵무새였다는 코미디다. ‘말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그 말이 들리는’ 경험이 새로웠던 시대였기 때문에 탄생한 웃음이며, 이를 담아내기 위해 시행착오를 겪은 결과 이러한 ‘말풍선’의 표현 형태가 채택되었을 것이다.

자, 이제 알 수 있겠지? 그렇다, 이 세상의 수많은 만화 장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그 기원이 그 표현 방식 그 자체로 거슬러 올라가는 ‘개그 만화’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런 ‘개그 만화가’의 거장, 요시다 전차라는 만화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위의 장황한 설명은 물론 그를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요시다 전차에 대한 간략한 소개

요시다 전차(吉田 戦車, 1963년 8월 11일 ~ )는 일본의 만화가이다. 이와테현 미즈사와시(현 오슈시) 출신으로 1985년 『팝업』(VIC출판)으로 데뷔했다.

1989년 『빅 코믹스 스피릿』(쇼가쿠칸(小学館)에서 『전염합니다. 를 연재 개시.

잡지, 신문, 웹사이트 등에서 만화, 에세이, 삽화, 기업 캐릭터 디자인 등을 담당하고 있다. 한때 부조리 개그 만화의 대표주자로 여겨졌지만, 그 관심의 중심은 인간 이외의 동식물, 우주생물, 심지어 비생물까지 의지와 언어를 가진 동화적이면서도 넌센스라고 할 수 있는 세계에 있다.

대표작 『전염됩니다』.

대표작 <전염합니다>는 기승전결이 절대 조건이었던 기존 4컷 만화의 상식을 뒤집고 부조리 개그 만화라는 장르를 확립한 선구자이자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연재 시작 후 많은 아류작을 탄생시켰고, 만화계뿐만 아니라 개그계, 연예계, 광고업계 등에서도 비슷한 취향을 가진 표현이 퍼져나갔다. 이 때문에 ‘개그’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여겨지고 있다.”

‘전염됩니다. 가 도전한 넌센스의 극치

현대 일본의 ‘개그 만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캐릭터의 행동의 파격성, 비정상성을 그린 것들이다.

그림적으로도 화려하고 독자에게도 쉽게 전달되기 때문에 특히 어린이들은 이런 작풍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요시다 전차의 작품은 다르다. 그는 그런 캐릭터의 화려한 ‘행동’이 아닌, 어디까지나 ‘언어’ 혹은 ‘개념’을 이용해 웃음을 유발한다. 그것도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웃음을 자아낸다. 그리고 때로는 웃길 뿐만 아니라, 그의 만화는 언어를 생각지도 못한 각도에서 다시 바라보게 하고, 우리가 얼마나 ‘언어’에 의해 단단히 묶여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것이 요시다 전차의 유일무이한 오리지널리티라고 생각한다.

‘라고 아무리 말을 늘어놓아도 끝이 없다. 바로 그의 대표작인 『전염합니다(伝染るんです)』에서 몇 가지 주옥같은 4컷을 소개한다. 에서 몇 가지 주옥같은 4컷 만화를 골라보자.

‘우카우카’와 ‘되돌릴 수 없는 것’

우선 이 작품을 봐주길 바란다.

본래 ‘우왕좌왕’이란 무의식화에서 생기는 심리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 주인공 남자는 의도적으로 하려고 하고, 게다가 그 결과 아내를 빼앗기게 된다는 그 말도 안 되는 모습에 이 작품의 재미가 있는 것이다. 자, 지금 당장 이 작품의 훌륭함을 어필하고 싶지만, 그 전에 먼저 이 작품도 한 번 보길 바란다.

스스로 주체적으로 기계 안에 낫토(일본의 전통 음식으로 매우 끈적끈적한 음식)를 집어넣는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도 ‘우카우카하기’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어떤 단어를 평소와 다르게 사용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재미있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일상에 넘쳐나는 단어를 참신한 각도에서 재조명하고, ‘역시 그 손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수작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순위를 매긴다면 ‘웃기는’ 작품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어 ‘말도 안 되는가’가 하나의 분수령이라면, 이 ‘웃기는’ 작품이 더 말도 안 되는 작품이다. 예를 들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은 물론 ‘행위’이기 때문에, 실천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우카우카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하나의 ‘마음 상태’이며, 이는 의도적으로 되려고 해도 될 수 없다. 오히려 무의식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등 ‘원치 않는 결말을 맞이하는 것’까지가 세트인 단어인 것이다. 불가능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이 작품은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비하면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우카우카하는’ 작품이 얼마나 뛰어난 작품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 단어가 내포한 의미를 거꾸로 뒤집어 개념의 전복을 꾀하는 것이 요시다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넌센스에서 가능성의 세계로

예를 들어, 학창시절로 돌아가는 꿈을 꾸고 있다가 아침에 허탈하게 깨어난다. 그리고,

‘아, 학교에 더 이상 가지 않아도 되었구나’

하고 안도한다.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 만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졸업 후에도 불구하고 [통학]이라는 과거의 수많은 반복이 시간을 초월하여 <학교에 가야만 하는 것 아닌가>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라는 보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그려져 있다. 재미있는 점은 졸업한 직후의 인간이라면 모를까, 노인이 되어서까지 의문의 생명체(전선 위에 있는 두 마리의 참새 같은 생물)가 뒤에서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그런 착각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갑자기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느냐’는 물음에 별다른 반응 없이 ‘정말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걸까’라고 고민하는 부분도 넌센스이고,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그렇게 허둥대는 모습도 웃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대단한 점은 그런 것이 아니다. 위의 내용에만 머무른다면, 어쩌면 평범한 개그 만화가도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 이 작품의 가장 뛰어난 점은 아기를 등장시킨 점이다.

아기를 제외한 다른 어른들은 당연히 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착각에 빠질 수도 있고, 백번 양보해서 불가능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 아기에 관해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작품 역시 아기를 등장시킴으로써 앞서 말한 ‘불가능성’을 극대화하고 그 말도 안 되는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여기서 나는 이 작품을 한 걸음 더 깊이 파고들어 보고자 한다.

‘가능세계’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철학-논리학 용어로, 원래 라이프니츠가 자신의 최선의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이것은 즉,

우리가 현실에서 살고 있는 이 세계와 몇 가지 점에서 다르지만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를 의미한다. 이야기의 설정으로도 자주 선호되는,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보는, 지금의 세계와 다른 또 다른 세계선이다. 그리고 이 개념을 이 작품에도 억지로 끼워 맞추자면, ‘학교에 가야 한다’는 그들의 착각은 방향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가능세계의 아류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작품 속 노파를 비롯한 두 중년 남성은 연금 생활이나 회사원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한 마리의 참새의 목소리에 의해 ‘학교에 간다’는 하나의 세계관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듯이 그들이 과거에 학교를 다녔기 때문, 즉 이 가능세계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과거, 즉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가능성의 세계는 상당히 위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억이란 지극히 모호한 것이다. 착각, 혼동, 덮어쓰기 등 누구에게나 빈번하게 발생하는 오작동으로 인해 변형되고 때로는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가능성의 세계다. 그래서 아기의 등장이다.

사람들은 이 마지막 컷에서 아기의 안도하는 표정을 보고 웃을 것이다. 아기는 ‘등교’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을 텐데, ‘학교에 가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라고 안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틀린 생각일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기억의 수수께끼를 믿고 ‘과거는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행위다. 그들의 가능세계가 아기의 가능세계에 비해 정확도가 높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작품이 기억이라는 것에 대한 요시다의 견해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억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은 아기의 착각을 비웃는다. 하지만 가끔은 나처럼 삐딱한 시각을 가진 독자는 문득 돌아보게 된다.

“정말, 아기가 더 말도 안 되는 것일까?”

만약 요시다 작가가 이런 가능세계의 존재까지 상정하고 그렸다면 대단한 일이다.

맺음말

언어에 의한 ‘불가능성’을 최대한 그려내고, 오로지 그림과 언어의 융합을 통해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한 요시다 전차. “전염됩니다(伝染るんです。). 가 연재가 종료된 지 꼭 30년이 지났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노와우군’도 젊은 층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캐릭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시대적 변화에 걸맞게 만화계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 SNS에서는 노출 수를 노린 에로, 그로테스크한 만화가 주를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의 강렬함만이 요구되는 시대인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요시다 작품처럼 ‘그림과 언어가 융합된’ 만화는 당연히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 앞서 언급한 ‘말풍선’을 탄생시킨 작가가 이런 현 상황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모처럼의 발명을 폄하하지 말아 달라’는 목소리가 들릴 것 같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현대 일본에도 요시다를 비롯해 ‘그림과 언어의 융합’이라는 이름으로 만화계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우카우카’하지 않고, 그런 작가들의 포교 활동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이 블로그의 작가 : Ri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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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 studies 【논고】 일본 현대 만화의 백년 전 기원

 수입-번역에서 국산으로 (아이케 엑스나)

【論考】 日本現代マンガの百年前の起源 :輸入・翻訳から国産へ(アイケ・エクスナ)
日本現代マンガの百年前の起源:輸入・翻訳から国産へ   日本漫画史を扱う著書や記事を読むと、「漫画・…

요시다 전차 Wikipedia

吉田戦車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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