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타츠야~금기야말로 우리 주전장/【벽과 계란】의 영상 작가/알이 벽이 되는 순간~

Comedy

아무런 변철도 없는 주택지. 어떤 시설의 주위를, 빙빙 둘러싸는 어른들. 귀여움에서 헤아리기 위해서는, 보통의, 인근 주민의 사람들인 것 같다. 그런 그들이 한 장 바위가 되어 그 시설 주위를 견고한 벽처럼 늘어서 있다. 그들을 선동하는 것은 호기심이든 야차마근성이라도 안될 것 같다. 그 모습에서는 불쾌, 의분, 증오, 그런 부정한 감정이 총동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시설 안의 무엇(·)인가(·)로 향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배리어에서도 붙여진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에서 한 걸음도 이쪽으로 다가가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손을 반죽하고 있다.

그 모습을 카메라는 시설 측에서 촬영하고 있다. 소지 카메라의 영상이라고 하는 것도 함께, 그들의 시선은 불필요하게 리얼하게 느껴져 관객인 우리는, 그것이 마치 자신을 향해 향한 것인 것처럼 착각해 버린다. 왠지 아늑하고, 지금 도망치는 듯한 기분에 달려있다.

이것은 허구의 그림이 아니다. 어떤 다큐멘터리 영화의, 1 장면이다. 이렇다고 뭔가 극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대학생이었던 자신은 이 장면을 보고, 한때 맛본 적이 없는 감정이 담아 온 것을 기억한다. 어디에나 있는 이치이의 사람들의, 증오로 달려간 얼굴, 얼굴, 얼굴… 언어화할 수 없는 모야모야로 한 마음이 당시의 나를 감쌌다.

‘A’라는 이 작품을 찍은 모리 타츠야는 내 대학 시대의 은사이다.

「너는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 가겠지」

10년 가까이 전, 붉은 얼굴의 모리 타츠야가, 오차노미즈의 대만 요리점에서 나를 향해 그렇게 말한 것을, 어제와 같이 기억하고 있다. 졸업하고 수년이 지나 OB회 가운데 모인 때다. 확실히, 당시 일하고 있던 소설이나 만화인가 무언가의 진척을 보고하고 있을 때, 쏟아진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술도 많이 진행하고 있던 본인은, 지금이 되어서는 그런 발언 등 잊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적어도 그 웃는 얼굴, 그 말에는 자애가 가득 있어, 잡으면서도 내가 창작 활동을 계속 온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의 덕분에 나는 인간이라는 생물의 다면성, 자의성, 그리고 집단이 되었을 때의 흉포성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것이 이러한 블로그 집필을 포함하여 자신의 표현물에 준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모리 타츠야라는 희대의 영상 작가가 남긴 공적을 소개하면서 왜 그는 금기를 찍는 것을 고집하는지, 또 기천열한 일작 ‘A’가 비춘 인간이라는 생물의 정체 을, 해명해 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날 그 캠퍼스에서 숲이 전해준 주옥의 말들을 기억의 한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것은 아마 나의, 어쩌면 개인적인 기억 여행이 될 것입니다.

모리 타츠야란?


모리 타츠야(모리 타츠야, 1956 <쇼와 31> 5 10 – ) 일본의 다큐멘터리 디렉터, TV 다큐멘터리 디렉터, 논픽션 작가, 소설가.

1992년에 미제트 프로레슬링의 텔레비전 문서 작품미제트 프로레슬링 전설 ~작은 거인들~ 데뷔.홍보 부부장 아라키 히로시를 중심으로 앵무새 진리 교신자들의 일상을 쫓는 다큐멘터리 영화 ‘A’ 공개.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정식 초대된다. 2001년에는 속편A2 발표.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프리미어 출품되어 시민상·심사원상 수상.한편, 텔레비전에서는, 후지 텔레비전NONFIX틀에서, 아키야마 마사토, 제방 유지, 기요다 마스키 에스퍼를 직업으로 하는 자들의 일상을 파악한직업란은 에스퍼(1998), 다른 생물을 희생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순을 그린 ‘1999년의 별의 ‘(1999), ”방송금지 노래‘~ 노래하고 있는 것은 누구? 규제하고 있는 것은 누구?~'(1999 ) , 금기로부터 눈을 떠오르지 않는 자세로 임한 다큐멘터리 작품을 계속해 제작.2014년에 전국적인 소동으로 발전한 사무라 가와치모리의고스트 라이터 문제
소재로
영화화하게
되어, 동년 가을부터 관계자에게의 취재나 촬영을 극비리에 진행시켜, 2016년에FAKE 극장 공개했다., 2023년의후쿠다 사건에서는, 47 일본 아카데미상 작품상·감독상·각본상에서 우수상, 41 골든 그로스상, 키네마 순보 독자 선출 베스트·
일본 영화 2, 획득 했다.

모리타츠야의특징

숲은 항상 금기에 도전하는 영상 작가이다. 컬트 종교, 신체장애자, 사형제도, 원전, 피차별부락…

그러나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양의 눈을 받는 것이 적고, 전국구의 영화관에서는 좀처럼 상영되지 않고, 단관에서의 상영이 기본이었다(작년 공개의 ‘후쿠다무라 사건’에 있어서, 거의 처음으로 라고 말할수록 전국적으로 상영이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도대체 어떤 영상을 찍어 왔는지를 드러내 보자.

・『직업란은 에스퍼』(1998년)

에스퍼임을 직업으로 한 3명의 초능력자의 일상을 통해서 그들의 정신을 탐구하는 단편 다큐멘터리. CX계 심야 프로그램 「NONFIX」용으로 제작·방영되었다.

그들은 모두 오컬트 붐을 타고 텔레비전 스타로 활약했지만 점차 그러한 프로그램들은 ‘초능력자의 인치를 폭로한다’라는 취지의 것으로 바뀌고 에스퍼들은 사기꾼이라고 불린다. 일이 되어 버린다. 또, 초능력이라고 칭한 퍼포먼스를 이용해, 컬트 종교나 멀티 상법에 손을 내는 배도 실제로 나오거나, 또 「정신 이상」이라고 하는 레텔을 치는 등, 주로 에스퍼는 ‘금기’의 영역에 들어갔다.

그런 가운데, 숲은 세 명의 초능력자에 밀착해, 그들의 괴로움, 세상과의 괴리, 라고 하는 것을 소지 카메라에 담아 간다. 또한 당연히 그들은 다우징과 염력, 숟가락 굽힘을 선보여준다. 그래도 숲은 그들을 향해 “눈앞의 현상은 인정하지만, 여전히 역시 초능력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숲에 대해 초능력자 중 한 명인 기요다는 이렇게 대답한다.

「초능력이라고 하는 것보다, 인간의 가능성과 마음의 나타나는 것 같은 것을, 좀 더 흥미를 가져가면 사람에게 상냥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10년 이상 전, 세미나 수업에서 이 영상이 찍힌 적이 있다. 학생이었던 저는, 건방진에도, 이런 질문을 숲에 부딪쳐 본 적이 있다.

「선생님, 실제로는 그 영상의 초능력도, 인치키였지요? 진짜 말해주세요」

저로서는, 숲의 반응에 기대하고 있던 것은, 「뭐 사실은…

그러나 실제 숲은 내 질문에 대해 아무것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초능력은 있어. 나는 몇번이나 보았다」

라고 흐릿하게 대답했다. 그 입만은 마치 “초능력이 있는지 여부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라는 느낌으로 나는 당황해 버린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 ‘직업란은 에스퍼’라는 작품에 대해 ‘초능력은 존재할까 하지 않을까’라는 의문 이외의 소감을 그저 청이세였던 저는 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흑백 명확하게 붙이고 싶다”라는 감정만이 선행하고, 초능력자라는 “금기”를 들고,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군청극을 비추는, 그 제작 의도나 이 작품에 담은 메시지를 상상할 수 없었다 이다.

・『FAKE』(2016년)

2016년 제작의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 고스트 라이터 문제가 발각되어, 와중의 인물이 되고 있던 사무라 카와치 수를 중심으로, 그를 취재하는 TV 관계자, 진위를 확인하러 오는 해외의 저널리스트 등을 1년 4개월에 걸쳐 쫓았다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청각장애를 가지면서 「교향곡 제1번《HIROSHIMA》」등을 작곡해, 한때는 현대의 베토벤과 들어올려진 음악가의 사무라 카와우치 마사루. 그러나 그 후의 2014년 주간지의 고발 기사에 의해, 「작곡은 하고 있지 않다」 「실은 귀가 들리지 않을까」라고 일전해 비난의 대상이 된다. 고스트 라이터를 맡은 작곡가 아라가키 타카시는, 「사무라 카와우치는 18년간 전부라고 거짓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작곡은 할 수 없고, 악기조차 연주할 수 없다」라고 주간지에서 주장. 그 후 사무라 가와치 씨는 사과 회견을 열었지만, 그 현장에서의 훌륭한 태도나, 기자의 질문에 반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진 거동으로부터, 「반성하고 있지 않다」 「역시 듣고 있지 않을까 라고 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와이드 쇼나 SNS상에서 불어났다.

촬영은, 그러한 세간의 관심이 서서히 희미해져 간, 2014년 9월부터 2016년 1월에 걸쳐,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시내의 사무라 가와치의 자택을 중심으로 촬영이 행해진 것이다. 유익한 소지 카메라가, 고스트 라이터 소동에 의해서 변모한 두 사람의 생활을 비추어 나간다. 사무라 카와치 가문의 축축한 공기, 음울한 표정, 그런 괴로운 분위기가 이어진다. 그렇다면 충분히 살찐 고양이가 부드럽게 카메라에 비치거나 (영화 감독의 마츠에 테츠아키는이 영화를 “고양이 시점의 영화”라고 평가했다) 사무라 카와우치 등 은은한 영상이 웃음을 자아낸다. 그리고 또 휘두르고, 예의 고스트 라이터라고 칭하는 아라가키에 직접 만나러 가거나 하는 등, 난기류와 같은 완급을 가지고, 관객을 흔들어 간다.

그러나 이 영화, 「사무라 강내의 몸의 결백을 증명한다」라고 하는 내용의 것은 결코 없다. 세상의 사무라 카와우치에 대한 관심은 물론, 「정말 작곡을 할 수 있을까」 「악기를 연주할 수 있을까」라고 하는 「흑백 명확하게 붙이고 싶다」라는 감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마치 그러한 사람들의 기대를 역으로 취하는 것처럼, 숲은 간단하게는 대답은 제시해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마지막 장면에서 사무라 카와우치 스스로가 작곡을 한 곡을 전자 피아노에서 연주해 보여주는 장면이 있지만, 그 연주도 실제로 아마추어의 영역을 나와 있는지 여부는 아마추어에게는 모른다 . 카메라에 찍힌 악곡 지시서에 관해서도 도저히 작곡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작중, 숲이 사무라 카와우치에게 이렇게 묻는 장면이 있다.

“뭔가 나에게 숨기고 있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사무라 카와우치는 즉답할 수 없다. 그동안 오랜 시간을 함께 씻어 잤어 이야기했을 숲에 대해 뭔가 숨겨진 것이 있다는 것인가. 하물며, 이전의 기자회견에서는, 공을 향해, 스스로 장애수첩을 반납하고 있는 것조차 고백한 사무라 카와우치이다. 이제 더 이상, 숨기는 것 아무것도 없을 것인데, 앞의 숲의 질문을 앞에, 사무라 카와우치는 눈을 떠난다. 그리고 그대로 모야 모야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영화는 끝난다. 관객은 초조하고 싶은 기분을 안은 채 극장을 뒤로 한다. 마치 그 회견에서 사무라 카와우치를 질문 공격을 한 기자 같은 마음이다. 소화 불량인 채 흑백 분명히 붙이고 싶은 기분이 소용돌이친다.

“결국 그는 거짓말쟁이인가? 어느 쪽이야?”

그건 그렇고, 당시 나는,

「그러고 보니 선생님, 한때 전혀 대학에 오지 않았을 때가 있었지만, 혹시 이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잖아」라는 것이었다.

「직업란은 에스퍼」도 「FAKE」도, 그 외 여러가지 작품이 있는 가운데 그가 소재로 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희미해지고, 가벼워지고, 거구의 끝에는 「금기」 취급마저 되어 왔다 사람들이다. 왜 그는 그렇게 늘 ‘금기’인 것을 소재로 하여 영상을 찍을 것이다. 취재 대상으로서 난이도도 높고, 또 원래 그 탓에 매번 흥행수입적으로는 신산을 핥고 있을 것이다. 『A』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적자였다. 그런데 왜 그는, 완고하다고 할 수 있는 태도로, 「금기」에 계속 도전하는 것인가.

아마 그 대답은 역시 그의 영화 데뷔작인 ‘A’에 의해 이미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아래에 설명하고 싶다.

대표작 『A』

『A』(에이)는, 모리타츠야 감독에 의한 1998년 제작의 일본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앵무새 진리교의 홍보 부부장이었던 아라키 히로시를 중심으로 사회와의 관계를 잡은 작품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외에 홍콩, 부산, 베이루트, 밴쿠버 등 각국의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제목의 ‘A’는 아라키(Araki)의 A, 앵무새(Aum)의 A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지하철 사린 사건 이후, 앵무새 진리교에 대한 사회의 태도를 앵무새 내부에서 비추는 드문 작품으로, 앵무새 신자의 수행이나 생활의 모습, 아라키에 마이크나 카메라를 향하는 보도 관계자의 모습이나, 앵무새 신자를 강인 에 체포하는 경찰관 등이 촬영되고 있다.

지하철에 신경가스를 뿌린다는, 미증유한 흉행에 의해, 세간은 패닉으로 빠져 있었다. 실행범은 잡혔지만, 그 소속 단체인 앵무새도 당연히 세상이 품는 공포, 증오라는 감정의 모순에서 면할 수 없었다. 이들 시설에는 보도기관이 쇄도했고, 밤낮 뉴스에서는 신자들의 모습이 비춰졌다.

그런 가운데 당시 프리 영상 디렉터였던 숲은 앵무새 시설 내부로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요가와 같은 이상한 운동, 모르는 음식, 전자기파를 흘리는 헤드 기어,

아무도 어리석고, 아무래도 컬트 종교, 라고 하는 라인업만이 카메라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영화의 신수는 그러한 자극적인 대상물을 포착한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이 영화의 재미있는 곳은 피사체가 ‘앵무새’인 동시에 ‘세상’이라는 점이다. 컬트 종교로 인정되고 범죄 조직으로 탄핵된 그들의 시설은 경찰, 우익 단체, 주민들에게 24시간 감시되었다. 신자들은 부담없이 거리에 나갈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앵무새라는 단체에 소속을 하고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 수행하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린 사건에 대해, TV를 보고 처음으로 알았다는 인간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일은 상관없다. 피해자, 사건 관계자들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건에 직접은 관계가 없는 사람까지, 앵무새 배싱에 기울여, 한 장 바위가 되어, 그들의 행위는 커녕, 그 일상생활까지를 위협했다. 그리고 숲은 아마 여기에 다큐멘터리 영화의 가치를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친필로 앵무새의 홍보부에 편지를 보내고 앵무새를 안에서 찍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텔레비전 방송국의 보도진 등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방식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컬트 종교 안에서 밖으로 카메라를 향한 전대 미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완성된 것이다. 앵무새가 강자이자 악, 시민이 약자이고 선이라는 절대적인 이항 대립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보는 자를 당황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사린 사건의 이해에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완수한 「A」의 간단한 소개를 해 왔지만, 아직도, 왜 앵무새라고 하는 「금기」를 숲이 취급했는지, 라고 하는 설명이 아직도 보인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저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 유명한 연설이 그 의문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 무라카미 하루키의 [벽과 계란] 연설

2009년 2월 15일 예루살렘 시내에 열린 시상식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연설이다. ‘벽과 계란’이라는 은유를 이용한 것으로 당시 큰 반향을 불렀다. 아래에 그 일부를 발췌한다.

여기에 딱딱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혀 깨지는 계란이 있다면 항상 계란 옆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벽이 정확하고 알이 잘못 되더라도 여전히 계란 옆에 있습니다. 올바르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또는 시간과 역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소설가가 어떠한 이유가 있어도, 벽의 옆에 서서 작품을 썼다면, 도대체 작가에게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요?

자, 대사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떤 경우에는 간단하고 명쾌합니다. 폭격기와 탱크, 로켓 탄, 흰색 인탄 기관총은 단단하고 벽입니다. 그들에게 부서지고 구워지고 관통되는 비무장 시민은 계란입니다. 그것이 은유의 의미입니다.

과연 그렇게 말하면 그의 작품에서는 항상 약한 인간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그런 이들을 박해하는 수수께끼의 존재, 조직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갈등은 분명히 벽과 계란의 관계와 비슷한 것이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A’의 경우로 대체해 보면 어떻게 될 것이다. 아마 틀림없이 달걀은 무고한 앵무새 신자들로, 벽은 그들을 탄핵하는 보도진, 세상들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뿐일까? 앵무새를 둘러싼 세상은 또 이런 간단한 이항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일까? 숲은 아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계란이 벽이 되는 순간

「벽」이라고 하는 개념 이해에 있어서, 모리타츠야에 있어 무라카미 하루키에 빠져 있는 것은, 「어떠한 계란이라도, 벽이 될 수 있다」라고 하는 가능성이다. 『직업란은 에스퍼』 『FAKE』를 되돌아보면 좋겠다. 초능력자나 작곡가를 탄핵하고 있던 것은 어디에나 있는 무해한 시민이었다. 평소에는 선량해야 할 이들은 일단 대상을 어떤(··) 것(··)으로 인정하면 무시, 냉우라는 단계를 거쳐 거구의 끝에는 박해를 하기 시작한다. 그 (··) 것 (··)은 그것이 바로 ‘금기’라는 개념이다. 난쟁이 프로레슬링, 피차별 부락, 난민 문제… 인간이란, 주위에 당연히 존재하고 있었을 것들을, 심각한 자의적인 판단 기준에 의해, 가볍게 「금기」인정을 하는 생물이다. 그리고 그 인정에 다수의 찬동을 얻은 순간, 찬동자들은 그 ‘금기’와 대치하는 폭도로 하는 것이다. 앵무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지역 주민은 원래보다 눈 위의 탄류였던 앵무새 시설에 대해서는 이미 ‘금기’인정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헌법상의 내심의 자유에 혼란스럽고 무시, 냉우라는 대응을 취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그 사린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마침내 박해로 스텝 업을 완수하고 시설에의 개입, 퇴퇴 운동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론, 그것을 선도하고 있던 것은 다름없는 선량한 지역 주민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좋은 아버지, 어머니였을 것이다 그들이, 일단 앵무새 시설 앞에 나오면, 귀신의 형상으로 무고한 신자들을 박해하는 것이다.

즉 숲은, 「금기」라고 하는 개념을 채용하는 것으로, 어떤 「계란」이라도 대상을 금기 인정해 버린 순간에 「벽」으로 되어 가는, 것을 데뷔 당시부터 「FAKE ‘에 이르기까지(실은 최신작의 ‘후쿠다무라 사건’에 있어서도 동등한 구조이지만, 길어지므로 이번 블로그에서는 할애한다), 그려 계속해 온 것이다. 더 이상 일변도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 정책의 스탠스를 취하는 숲이지만, 그 동기를 계속 지탱한 것은 과연, 사회적인 의분일까, 개인적인 정의심일까? 만나지 말아라. 그에게 지금까지의 작품군을 창조해 온 것은, 그런 순진한 도덕 감정에 근거한 것은 결코 없는 것이다.

・매끄러운 “벽과 계란”들

‘A’의 속편으로, ‘A2′(2001년)라는 영화가 있다. 파산한 앵무새 진리교를 대신해 알레프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활동을 계속하는 신자들. 그런 이들과 지역 주민의 대립, 당사자가 된 신자 자신이 말하는 단체 규제법의 방아쇠가 된 폭행 감금 혐의 사건의 전말, 우익 시위의 생각과 언론 보도의 어긋남 등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 속에서 정말 이상한 장면이 있다.

신자들을 배척하려는 주민들과 신자 사이에 ‘기묘한 관계’가 태어났다. 배척을 하려고 텐트 오두막을 만들고 바라보고 있던 주민들이었지만, 그들은 신자들과 담담에 이야기를 하는 것을 거듭하는 사이에, 무려 오히려, 신자들과 사이가 좋아져 버린 것이다. 결코 신자들에게 둥글게 된 것은 아니다. 욕심을 끊고, 출가하고 생활하고 있는 신자들과 이야기해 보니, 예상외로 성실하고, 정교한 말을 하는 청년들로, 전혀 무섭지 않았던 것이었다. 신자들에 대해 “탈회하면 나에게 물어봐라”라고까지 말해주는 주민. 최종적으로는 신자를 감시하는 텐트나 조립식이 다른 곳이 아닌 그 신자들과 협동해 해체되어 끝난다. 그 마지막 날 감시하고 있던 주민과 감시당한 신자는 ‘앵무새 절대 저지’의 간판을 한가운데로 삼아 기념사진을 찍는다. 감시 오두막이 해체된 뒤에도 주민들과 신자의 울타리 너머 교류는 계속된다. 경찰의 강제수사 상황을 우려한 주민 남성은 가로코시에 모두 시설을 방문해 “감시하는 모임이 지키는 모임이 되어버린 아하하”라고 웃었다.

몇 년 전 어느 극장에서 이 작품이 부활 상영했을 때, 나도 발길을 옮겼지만, 이 장면에서 관객은 폭소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모리 타츠야가 그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서두와 조금 음색이 바뀌어 버렸다. 전단에서는 나는, 「나는 모리타츠야로부터 인간이라고 하는 생물의 다면성, 자의성, 그리고, 집단이 되었을 때의 흉포성이라고 하는 것을 배웠다」라고 써, 본문에 도입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에 대해, 또 그의 작품에 대해 써 나가는 사이에, 아무래도 그의 철학은, 거기보다 더, 더 깊은 곳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되어 버렸다. 이하, 다시 정리해 본다.

사람은 “금기”를 거기 보았을 때, “알”에서 “벽”으로 변모한다. 방금전까지 약한 피해자였을 자가 하룻밤으로 하고 폭력적인 가해자로 모습을 바꾼다. 그러나 그 사실 냉철하고 무자비하고 견고한 것처럼 보이는 ‘벽’은 여전히 ​​완전히 인간적이다. 상도 변함없이 자의적이고 심한 의지가 없다. 어제까지 배척하고 있던 상대와 다음날에는 사이좋게 기념 사진까지 찍을 수 있다. 그 정도, 「벽과 달걀」문제는 본래 매우 활기찬 것이다. 이 매끄러움을 깨닫는지 여부가 중요하다. 자신들이 지금, 「벽과 달걀」 어느 쪽에 근거해 버리고 있어 그것이 얼마나 근거가 있는 것인가. 문득 멈춰서 생각해 보고, 그 무근거차에, 바보 바쁘고 탈력할 수 있으면, 거기에는 선도 악도 생기지 않게 된다. 그것을 활과 깨닫지 않고 동조 압력으로 추진해 버린 앞에 있는 것이 아마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모리 타츠야는, 이러한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성을, 역사적인 숙명과 같은 것을, 「금기」라고 하는 관점으로부터 폭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뭔가 의분으로 달려간, 깎아내린 정의감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상을 미소 짓는 태도조차 인정된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카메라를 가진 숲이 웃음을 숨길 수 없는 모습이 영상 너머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방금전, 영화 감독의 마츠에가 「FAKE」를 「고양이 시점의 영화」라고 평했다, 라고 썼지만, 그것을 받아서 나는 문득, 모리 타츠야는, 나츠메 소세키의 「고배는 고양이이다」에 있어서 고양이 그 자체가 아닌가, 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아마 항상 고양이의 시선으로 인간관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담 위에서 중생의 번개를 높이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고양이의 눈에 비친 활기롭고 사랑스러운 세계야말로 『A』이고 『직업란은 에스퍼』이고 『FAKE』일 것이다.

결론

지금이라 생각해 보면, 그 대만 요리점에서 나에게 보여준 그 미소도 고양이적인 태도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사회인이 되더라도 프라플라와 만화나 소설이나 현을 빼는 나에 대해 자비와 자비와 그것을 싸는 활기찬 느낌을 느끼고 그런 목소리를 줬는지 생각한다. . 그러나 나는 결코 바보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벽과 달걀’을 영상으로 하는 것에 평생을 베팅한 남자이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도 피사체에 대해 역시 사랑을 느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도, 모리타츠야의 애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향후도 그의 작품의 계몽 활동에 흥미로운 소존이다.

★이 블로그 작가 : Rick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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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모리 타츠야 Wikipedia

森達也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카무라 야스유키×마츠에 테츠아키

岡村靖幸×松江哲明 : 森達也監督15年ぶりの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 佐村河内守“主演”の『FAKE』を語り尽くす 後編
マガジンハウスが月刊発行しているファッション誌「GINZA」の公式ウェブサイト。東京から発信するファッション、カルチャー、ビューティなどの最新トレンドや、グルメ、占いなどの情報をお届け。その他、「GINZA」ならではのスペシャルコンテンツ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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