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 영화의 대가·모리타 요시코~사생문적인, 너무 사생문적인 영화들~

Comedy

어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주인공은, 철도를 사랑하는 청년, 코마치와 코다마(신칸센의 이름이 유래가 되고 있다). 양쪽 모두, 휴일은 오로지 철도를 타고 관광을 즐기는, 기약하지만 상냥하고, 연애에는 깊은, 전형적인 오타쿠 기질의 ​​젊은이이다. 그 두 사람이 철도를 통해 만나 철도를 중심으로 일과 연애가 발전해 나간다. 소개하고 싶은 것은 그 영화 속의 하나의 장면이다.

주인공인 코마치가 사무실에 출사해 온다. 거기에 그의 것을 좋아하는 동료의 여성 사원이 달려온다. 그리고 그에게 “좋은 물건이 비었어”라고 몰래 귀를 박는다. 그들은 부동산 개발자로, 우량한 물건의 동향에 익숙하다.

코마치는 최근에 살고 있던 아파트의 노후화에 의해 주처를 잃고 있는 상황이었다. 풍경을 즐기는 타입의 철도 오타쿠인 그는, 지하철에의 액세스가 편리한 그 맨션에는 흥미는 나타내지 않는다. 그리고 특히 진전하지 않은 채 그 대화는 끝나고, 두 사람은 카메라 밖으로 걸어간다. 무슨 일이 없는, 어디에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경의 1 장면이다.

그러나 그런 장면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그들의 상호 작용에 도중부터 마치 집중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 교환 배후에서, 어떤 것이 펼쳐지고 있어 거기에 눈을 빼앗겨 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배후의 사무실의 현관 부근에서 어쨌든 두 남자가 비비고 있다. 흑인의 경비원이, 클레이머라고 생각해 남자를 꽉 조이고, 오피스로부터 손잡이 나오려고 하고 있다. 양쪽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단지 업무적으로, 경비원은 그 체구를 살려, 클레이머 남자를 안아 쫓아내려고 하고 있다. 그것이 앞의 물건의 교환과 동시 병행으로 화면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상하다.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고 있을까, 그 너무 맥략이 없는 연출 방법에도 웃으면서, 우리는 당황해 버린다.

이런 연출은, 영화 제작의 교과서적으로는, 절대로 법도이다. 어떤 장면을 그릴 때

“불필요한 정보는 배제하는 것”이 ​​첫 번째 원칙으로 내려져야하며 배경 소품, 엑스트라, 조명, 음악, 모든 것이 그 장면에만 존재해야합니다.

물론 그 원칙은 이 작품에도 적용돼야 한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그들의 대화는 영화의 향후 전개로서 그 나름대로 중요한 장면이며, 본래라면 관객들에게 집중하고 그 상호 작용을 들려주고 싶은 곳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원칙을 쉽게 깨고 관객들에게 정당하게 당당하고 위화감의 혼돈을 제공하고 있다. 모리타 요시코 감독의 『우리 급행 A열차로 가자』라는 영화이다.

모리타 영화에는 이러한 연출이 산견된다. 또 그것이 그의 오리지널리티이며, 코미디 영화의 집으로 이름을 치게 하는 것인데, 나는 지금까지 그것이 이상하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코미디 영화처럼 알기 쉬운 개그, 일탈 행위 등이 있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모리타는, 상술한 것과 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을 그릴 뿐이다. 단지 그 “거치는 방법”이 신기하기 때문에, 위화감이 되고 있어, 거기를 우리는 웃어 버린다.

원래, 이 위화감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우리가 웃어 버리는 것은, 이러한 위화감만이 요인일까.

그리고 모리타는 이 연출에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 것일까.

이번에는 이 수수께끼를 해명해 나가고 싶다. 그 때문에, 다소 곡예적인 방법이지만, 문장 표현의 형태의 하나인 「사생문」이라고 하는 것을, 해명의 툴로서 채용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사생문」의 개념에 혁신을 베푼, 나츠메 소세키라는 희대의 작가의 사상에도 다가가고 싶다.

모리타 요시코의 간략한 소개

모리타 요시미츠(모리타 요시미츠, 1950년 1월 25일 – 2011년 12월 20일)는 일본 영화 감독, 각본가. 시리어스한 드라마로부터 희극, 블랙 코미디, 아이돌 영화, 연애 영화, 공포 영화, 미스터리 영화와 폭넓은 테마를 의욕적으로 취급해, 화제작을 많이 발표했다.

1981년, 젊은 낙어가를 주인공으로 한 「의·같은 것」을, 친가를 저당에 넣은 부채로 제작해 데뷔.

1983년 마츠다 우작 주연의 ‘가족 게임’을 발표한다. 가정을 시니컬하게, 폭력적으로 그린 ​​출색의 블랙 코미디이며, 무심코 일상의 풍경을 비일상적으로 묘사한, 사람을 먹은 연출이 평판이 되었다. 키네마 순보 베스트 텐 1위 등 같은 해의 주요 영화상을 많이 수상, 일부 고평가에 머물렀던 전작에서 크게 도약해, 신세대의 귀재로서 널리 주목을 끈다.

1984년, 마루야마 켄지 원작, 사와다 켄지 주연의 ‘설렘에 죽는다’를 거쳐 야쿠시마루 히로코 주연의 ‘메인 테마’가 대히트했다.

1985년에 마츠다 유작 주연으로 나츠메 소세키 『그때부터』를 영화화했다. 다시 그해 주요 영화상을 독점해 그동안의 이색작 노선과는 달리 격조 높은 문예대작이었던 적도 있어 폭의 넓이를 보여 영화계에서의 지위를 더욱 높였다.

1990년대 전반은, 영화의 세계로부터 조금 떨어져, 시나리오 집필이나 경마 에세이의 연재등의 활동을 우선.

1997년 5월에 와타나베 준이치 ‘실락원’을 관공서 히로시, 쿠로키 히토미의 주연으로 영화화했다. 인생에 지친 중년 남녀가 불륜의 끝에 마음에 든다는 스토리로 R-15 지정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관객동원수가 200만명을 넘는 대히트가 되었고, ‘실락원(한다)’이라는 말은 올해의 유행어 연간 대상이 되었다.

거기에서도 정력적으로 작품 발표를 계속해 2011년 12월 20일, C형 간염에 의한 급성 간부전으로 사망했다. 61세몰.

모리타 영화의 사생 문적 영화 / 나츠메 소세키와의 유사성

・『그때』에 보는 위화감과 사생문

그런데, 여러가지 장르의 영화를 발표해 온 모리타이지만, 그 작품의 특징의 하나로서는, 역시 그 희귀한 「코미디센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노・같은 것』『그리고』『우리 급행 A열차로 가자』라는 영화에서는 곳곳에서 그 센스가 빛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항상 알기 쉬운 개그나 등장인물의 과장한 일탈행위 같은 종의 웃음이 아닌 것은 전단에서 설명이 끝났다.

또 하나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그때’의 한 장면이다. 이상하게도 원작은 나츠메 소세키인 이 영화는 고등 유민인 주인공의 대조가 가장 친한 친구의 아내를 좋아하게 되어 윤리관과 애정과의 틈새로 판 사이에 끼어드는 이야기이다. 발췌하는 장면은, 그 주인공이, 또 다른 작가의 친구로부터와 한 잡지에의 집필의 의뢰를 받고 있는 곳이다.

안쪽에서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이 주인공과 작가의 친구이다. 메밀을 먹으면서 친구는 대조에 집필을 권하지만, 돈에 곤란하지 않은 대조는 그것을 부드럽게 거절한다. 또 여기도 대조라는 부모로부터 금전적 원조를 받고 불로소득으로 사는 인간을 동전 게바로 하고 있는 친구와 대비시킴으로써 캐릭터 붙이고 있는 중요한 장면이다. 단지 눈치채는 대로, 역시 이 씬도, 일근줄에서는 어떠한 것 같다. 이 앞의 남성이 묘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우연히 가까이 앉아 있는 이 남자는, 그 거동으로부터 아마 사카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있다). 그는 두 사람의 대화를 훔쳐 듣고, 특히 작가의 친구 쪽의 몸짓을 흔들어 준다. 라쿠고는 앉으면서 상반신의 움직임만으로 몇 명의 등장 인물을 연기 나누는 예술이므로, 사카이에게 있어서는 이렇게, 수행의 일환으로서 평소부터 주위의 인간의 거동을 모방한다는 행위 자체는 특히 드문 것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인공을 넣어, 화면의 앞에 비치고 있기 때문에, 이상하다. 뒤에서 중요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우리 관객은, 아무래도 앞의 치가의 거동에 눈이 가 ​​버려, 웃음이 쏟아져 버린다. 모리타 유익의 연출이다. 그러나 문제는 왜 이 연출이 원래 위화감으로 비치는지, 그리고 왜 그것을 재미있게 느껴져 버리는지이다.

요인으로서,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영화 원칙(불필요한 정보는 배제하는 것)이, 영화 제작진 뿐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 중에도, 너무 깊게 침투하고 있는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감독에게는, 어떤 장면을 그릴 때, 그 장면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이외의 정보를 최대한 깎아내는 것이 요구되고 있는 한편, 또 일반 대중은, 그러한, 이미 「연마된」영상 이외를 눈에 띄는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일탈한 영상은, 「위화감」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병에 쓰러진 애견이 죽어가는 장면을 찍는다고 해서 누가 그 음란한 우는 주인의 뒤에서 흐르는 에너지 드링크의 텔레비전 CM을 카메라에 비추겠는가. 그것이 비록 리얼했다고 해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연결되지 않는 정보는 불필요한 것으로 비쳐, 그것이 바로 위화감의 정체일 것이다. 그리고 원래 인간이란, 거기에 무엇인가 「사회적 일탈」을 찾아내면, 「웃음」이라고 하는 툴에 의해 「시정」을 시도하는 생물이다(「웃음」의 메카니즘에 대해서, 처음부터 여기서 깊은 호리리면 길어진다 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또 별도 블로그를 써 보기로 한다). 그러므로 세오리를 무시한 이 “안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두 사람을 놓고 몸짓을 하는 치가를 ​​앞에 둔다”는 연출 방법에 웃음이 담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이유는 그것뿐일까. 이 장면이 웃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일탈」하고 있기 때문뿐일까. 모리타 영화의 경우 대답은 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이 웃을 수 있는 것은, 이 묘사가 아마 「사생문적이니까」, 라고 하는 것이, 또 하나의 해로 생각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기 전에 우선, 「사생문」이라고는 도대체 무엇인가, 를 풀어 갈 필요가 있다.

・사생문이란

사생 문이란, 읽고 글자와 같이, 문장 표현에 있어서의, 문체의 정의이다. 영화 감독을 테마로 삼아두면서, 그 매력을 전할 때 문체의 정의를 꺼내는 것은 겉보기에 이상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일단 원래 사생문의 일반적인 해석에서 보자. 사생문이라는 말은, Wikipedia에서는 일단, 아래와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사생에 의해 물건을 있는 그대로 쓰려고 하는 문장. 메이지 시대 중기, 서양 회화 유래의 「사생」(스케치)개념을 응용해 하이쿠·단가의 근대화를 진행하고 있던 마사오카 코규가, 같은 방법을 산문에도 적용해 창도한 것으로, 아키라·타카하마 허자들을 중심으로 발전해 근대적인 일본어에 의한 산문 창출에 역할을 맡았다.

과연 즉, 눈앞에 있는 풍경을 가능한 한 리얼하게 가까운 상태에서 캔버스에 찍는 ‘스케치’라는 말을 문장으로 대체한 것이 ‘사생문’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모리타의 영화는, 마치 리얼에 존재하고 있는 풍경이, 우연히 카메라에 들어간 것 같은 장면이 많이 볼 수 있다. 또 그런 극히 자연스러운 연출 방법이 마음을 완화시켜 많은 팬들을 치유하고 있다는 점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이 「사생문」의 이해 뿐이라면, 사생문 영화란 즉 「리얼한 것을 단지 리얼하게 비추고 있을 뿐의 것」이 되어 버린다. 이 「사생문」의 정의만으로는, 왜 모리타 영화가 「위화감」 그리고 「웃음」을 낳는 것인가가, 불명료하다. Wikipedia적인 「사생문」의 정의와, 내가 말하는 모리타의 「사생문적 영화」의 정의 사이에는, 아직도 그루브가 있는 상태이다. 도대체 이 그루브, 어떻게 채워지는지―

그래, 거기서 등장하는 것이 다름없는 나츠메 소세키라는 존재인 것이다. 그가 ‘사생문’의 개념을 혁신한 것이 나에게 모리타 영화를 ‘사생문적’이라고 평가하게 하는 별다른 요인인 것이다.

· 나츠메 소세키와 사생 문장

나츠메 소세키는 활동 초기, 자신이 집필한 평논문에 있어서, 바로 「사생문」이라고 하는 타이틀로, 사생문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이것을 읽으면, 상기의 정설과는 또 조금 다른 각도로부터, 사생문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래에 일부를 발췌한다.

사생문은 부모가 아이를 보는 태도이다. <중략>

사생문가가 그리는 곳은 많아 심각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심각한 일을 걸어도 태도로 밀어가기 때문에 조금 보면 바닥까지 가지 않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태도로 세간 인정의 협상을 보니 대부분의 경우에는 활주의 분자를 포함한 표현이 되어 문장 위에 나타난다.

과연 어른들이 아이끼리의 싸움을 보고 미소처럼 보이는 것도 그들의 감정에 동기하지 않고 부감으로 그 교환을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봉제인형을 받은 5세아에게 감정이입해 울어버리는 부모가 어디에 있을까. 또한 소세키의 대표작인 ‘고배는 고양이이다’ 수수께끼는 그 이름대로 고양이가 주인공이지만, 그 고양이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인간의 군청극은 어딘가 높이에서의 구경 같은 느낌으로 미끄러졌다.

이와 같이 소세키는 사생문의 정의를 ‘단지 스케치’가 아니라 ‘높이의 구경에 의한 미끄러움의 양성’이라는 정의로 쇄신했다. 그리고 이 쇄신을, 아마 모리타는 놓치지 않았다. 그런 소세키의 철학을 자신의 영화 제작에 도입해, 「위화감」과 「웃음」을 낳는 작풍에 이르렀던 것이 아닌가, 라고 나는 노려보고 있다 (소세키 원작의 영화화를 감독하고 있기 때문에 , 아내가 틀린 추측도 아닐 것이다).

자 길어졌다. 이상을 바탕으로 모리타 영화의 예의 장면을 다시 분석해 보자.

· 모리타 영화의 사생 문적 묘사

앞서 나온 『우리 급행 A열차로 가자』에서의 코마치와 여성 사원의 교환과, 흑인 경비원과 클레이머 남자와의 격투가 동시에 카메라에 들어가 있는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 화면 내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두 가지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그것을 우리 관객은 하나님의 시점과 같이 ‘군청극’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만약, 예를 들어, 카메라가 뒤의 두 사람의 격투의 묘사에만, 포커스하고 있었다고 하면, 사태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에 따라서는, 부풀어 오르는 상완 이두근을 가진 경비원의, 충성심이 가득한 눈동자에 감정 이입을 해, 「그런 수상한 사람, 빨리 쫓아내버려」라고 내심 성원을 보낼지도 모르고, 혹은 사람 에 따라서는 이마에 아부라 땀을 흘리는 크레머 남자의 슬픈 시선에 동정하고 ‘힘내지 말라’고 침을 마시면서 바라볼지도 모른다. 어쨌든, 임박한 그들의 표정에서, 그 감정으로 몰입해, 화면에 넘치도록(듯이) 할 것이다. 그러나 모리타는 이 격투의 묘사를 주인공들의 배후에 놓아 버렸다. 그들의 표정, 목소리는 차단되어 왕래하는 엑스트라와 같은 정도의 사이즈감으로 비치는 단순한 풍경 중 하나로 변모했다. 그리고 이것에 의해, 하나님의 시점을 손에 들고 있는 우리 관객에게 있어서 그들의 백열한 격투는, 순식간에 「활기찬」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아닐까. 인생에서의 모든 장면을 되돌아 보아도 같은 것은 아닐까. 그 자리에는 뭔가 진지하게 되어 있는 사람도 있으면, 부진한 사람도 있다. 울고 있는 사람도 있으면, 웃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 상반되는 상황이 한 때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이 리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면 때때로 카메라 등이라는 아이템을 꺼내고, 노린 장소를 의도적으로 포커스해, 관객을 노리는 대로의 감정으로 유도시키는, 등의 행위는, 모리타, 나아가서 소세키로부터 하면, 오히려 그쪽이 좀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위와 같은 혼교한 공간이야말로 자연스럽고, 이러한 자연을, 훨씬 높은 높이에서 보았을 때, 사람은 그것이 재미있고, 매끄럽게 느끼는 것이다. 단지의 베란다로부터 세탁물 너머로 보이는, 초등학생의 운동회가, 미소 같게 느끼는 것처럼. 이것이 모리타 영화의 ‘위화감’과 ‘웃음’에 메커니즘의 정체이다.

끝에…

또 해도 좋아하는 나츠메 소세키를 꺼내 버렸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세상의 이미지란, 신경쇠약하고, 이구하고, 어려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마 그것도 또 빗나가는 것도 아니겠지만, 한편으로 소세키라는 인간은 역시 이 속세에서 활동하는 인간들이 번뇌에 빠진 중생들이 사랑스럽고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합니다. 벌레의 거처가 나쁘거나 아내이든 제자든지 흩어져, 또 피해 망상이 강하고, 주위의 사람이 자신의 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편굴한 남자는, 다른 한편으로는 , 그러한 자신도 포함한 범인의 생활을, 굉장히 리얼한 시점에서 ‘사랑해야 할 활기찬 것’으로서 자세하게 소설에 쓰여질 정도로, 박애주의적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그이기 때문에 등장시키는 사랑해야 할 활기찬 캐릭터들을 적어도 자신의 작품 중에서는 정해진 근도에 맞추어 마치 장기의 말처럼 그리는 것을 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을 증거로 『사생문』에서는 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근육이란 무엇이다. 세상은 근육이 없는 것이다. 근육이 없는 가운데 근육을 세워 보면 시작되지 않을까.

어쩌면 모리타도 같은 기분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모리타는 만년, 「우리 급행 A열차로 가자」의 속편을 획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코마치와 코다마가 이번에는 또 다른 토지에서 예에 따라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군청극을 펼치는 내용이었을까.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는 이 세상을 떠났다. 61세. 아쉬워지는 죽음이었다. 아직 앞으로였을 것이다. 아마 모리타라는 영상 작가는 바로 거기에서가, 사카이처럼, 늙으면 늙을수록 맛 깊이가 늘어나는, 원숙기가 되는 곳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애교의 말을 뱉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은, 일개의 모리타 영화의 팬으로서의, 스스로 거는 위로의 말이다. 다소 근심한 표현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는 천국에 가는 것으로 드디어 진정한 미끄러짐을 손에 넣었다고도 파악될지도 모른다. 그의 세상은 그야말로 신의 관점이다. 그의 세상에 가는 것으로 처음으로, 그가 요구하고 있던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해야 할 활기찬 것」들의 군청극이, 눈 아래에 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거기에는 이미 동경하는 소세키 선배가 100년 이상 질리지 않고 특등석을 잡고 계속 앉아 있을 것이다. 가능하면 양자 어깨를 늘어놓고, 우리의 근육이 없는 이야기를, 웃으면서, 지켜봐 주었으면 한다. 그런 근심하고 마음대로 망상이 무심코 부풀어 버린다.

★이 블로그의 작가 : Ri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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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모리타 요시코 Wikipedia

森田芳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사생 문 Wikipedia

写生文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http://books.salterrae.net/amizako/html2/sousekikokkeibungaku.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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