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개봉한 ‘LA LA LAND’는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역대 최다인 14개 부문(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감독상을 비롯한 6개 부문을 수상한 메가 히트작이다. 가슴 뛰는 음악, 씁쓸한 어른들의 로맨스, 그리고 반짝이는 색감. 그 완벽한 하모니에 전 세계 관객들은 눈을 뗄 수 없었다.
감독은 데미안 차젤. 당시 30세였다. 어린 나이에 영화계 정상에 오른 천재 감독이지만, 그는 내한 당시 인터뷰에서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스즈키 세이준의 ‘도쿄 유랑자’에 대한 숨은 경의를 표했다.”
아마 행사장에 있던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스즈키가 누구야’, ‘그런 작품, 들어본 적도 없다’, ‘세계의 크로사와라면 모를까…’.
그럴 만도 하다. 웬만한 영화 팬이 아니라면 일본 밖에서 스즈키 키요순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카데미상이나 칸국제영화제 등 해외에서의 수상 경력도 없고(초청작으로 선정된 적은 몇 번 있지만), 국내에서의 흥행 성적도 동시대 구로사와 아키라, 키노시타 에스케, 이치카와 콘 등의 감독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순이 생후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2017년 타계), 차젤과 같은 천재적인 크리에이터들에게 바다를 건너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괄목할 만한 사실이다. 필자 역시 대학생 시절 청순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을 보고 충격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다. 그가 찍는 극채색에 넘치면서도 아득한 영상은 ‘청순미학’이라 불리며 영화계에 센세이셔널한 혁명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그런 스즈키 세이준을 영화 선인(仙人)이라 칭하며(그 풍모는 마치 선인처럼 보인다), 세이준 미학을 풀어나가면서 현대에 끼친 영향도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스즈키 키요순과 전쟁
- 프로필
스즈키 키요순(鈴木 清順, 1923년 5월 24일 ~ 2017년 2월 13일)은 일본의 영화감독 겸 배우이다. 닛카츠의 전속 감독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고바야시 아사히, 다카하시 히데키, 시시도 타츠야 등을 주연으로 기용했다. ‘살인의 낙인’은 일반 영화뿐만 아니라 컬트 영화로도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지고이네르바이젠’, ‘양염좌’, ‘몽유병’ 3부작에서는 유려한 영상미를 보여주었다. 그 독특한 영상 표현은 ‘청순미학’으로 불렸다. 말년에 메가폰을 잡은 ‘피스톨 오페라’, ‘오페레타 너구리 궁전’의 아방가르드한 스타일은 전 세계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 전쟁 체험
영화 평론가들은 그의 화려한 영상 작품의 이면에는 그의 가혹한 전쟁 체험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자주 한다.
1943년(쇼와 18년) 학도병으로 징집. 육군 이등병으로 입대. 필리핀으로 향하는 함대는 13척이었지만, 무사히 현지에 도착한 것은 단 두 척뿐이었다. 마닐라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수송선에서는 그라만기의 습격을 받아 많은 동료를 잃었고, 청순 자신도 바다를 표류했다.
대화 상대가 없어 자기 내면의 대화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전장이 청순의 정신세계를 결정지었는지도 모른다. 이후 대만을 전전하며 육군 소위로 종전을 맞이한다.
유례없는 경력과 경력
그의 영화인, 나아가 영상작가로서의 경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서울대 불합격에서 감독으로 데뷔, 성공신화를 쓰다
1946년(쇼와 21년) 제대 후 히로사키 고등학교에 복학, 1948년(쇼와 23년) 졸업 후 도쿄대학 경제학과에 응시하지만 실패한다. 같은 해 친구의 권유로 조감독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다.
1956년 공동 각본의 ‘승리를 내 손에’를 본명인 스즈키 세이타로(鈴木清太郎)라는 이름으로 첫 감독을 맡았고, 1958년 ‘암흑가의 미녀’로 세이순으로 개명, 이후 1959년 야쿠자, 창녀 등 언더그라운드의 군웅할거극을 하드보일드하게 그린 작품들이 전쟁으로 인해 대신 피에 굶주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또한 ‘육체의 문’, ‘도쿄 유랑자’, ‘겐카에레지이’ 등에서는 현대적이고 신선한 색채 감각과 영상 리듬으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만들어 ‘청순미학’이라 불릴 정도로 일부에서 열광적인 팬을 확보했다.
- TV 애니메이션 데뷔
1977년(1977년)부터 방영된 TV 애니메이션 ‘루팡 3세’ 2기 시리즈에 감수로 참여한 바 있다.루팡의 각본가와 친분이 있어 이를 계기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 같지만, 실사 영화를 주로 감독하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애니메이션에 관여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참고로 여담이지만, 루팡의 신데렐라 시리즈를 감독한 사람은 사실 그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2기 마지막 회 대본을 두고 두 사람이 대립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 작품은 역대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루팡 시리즈는 모두 가짜이며, 진짜 루팡 일당이 가짜를 때려잡는다”는 이야기였다).
청순이 격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바빌론의 황금전설’에서 다시 감독을 맡았다.
다만 이러한 루팡 관련 그의 작업을 보면, 예의 청순한 미학을 밀어붙인다기보다는 기존의 루팡의 매력을 끌어내기 위해 뒷바라지에 충실했던 것 같다.
- 그리고 아티스트 스즈키 키요시 순으로
1980년에는 우치다 백켄의 ‘사라사테의 판’을 원작으로 한 ‘츠고이네르바이젠’을 완성했다.
4명의 남녀가 사라사테가 직접 연주하는 ‘지고이네르바이젠’ SP 음반을 둘러싸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요염한 세계로 빠져든다는 기괴하고 기발한 작품이지만, 이 작품은 그의 작품군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참신한 촬영 방식과 카메라 앵글, 그리고 컷팅으로 완성된 영상은 초현실주의적이고 실험적이었다. 가부키, 노 등 전통 예능을 연출 기법으로 도입해 고대와 현대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도 당시로서는 신선했다. 그전까지 대중 오락적인 작품을 주로 찍었던 청순은 이 작품 이후 예술적인 면을 충분히 살린 작품을 계속 발표한다.
‘육체의 문’에서 본 ‘청순 미학’
자, ‘LA LA LAND’의 감독 차젤은 ‘도쿄 유랑극단’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음악영화로서의 영향이 강했던 것 같다. “색채” 측면에서 보자면 역시 ‘육체의 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전후 빈민가를 힘겹게 살아가는 창녀들의 이야기인데, 그 그녀들이 입는 옷이 ‘LA LA LAND’의 주인공 미아를 둘러싼 여성들의 의상 그 자체이다.
전후 일본의 창녀들과 현대 할리우드의 신인 여배우라는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 역경을 딛고 뭉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라는 주제의 상관관계와 그 강인함을 보여주는 색채에 강한 공감과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청순의 색채 감각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이를 풀기 위해서는 NHK 아나운서이기도 한 동생 스즈키 켄지(鈴木健二)의 말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는 청순의 추모 책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형의 작품을 보면 전쟁 경험의 영향이 너무 잘 드러날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 그 밝은 색채 감각. 집이 공장이라 색채가 부족한 생활환경에 대한 반작용도 있겠지만, 역시 생사를 넘나드는 ‘색채에 대한 갈망’에 다름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색채가 풍부한 세상은 당연하다. 하지만 청순처럼 전쟁 중 가난한 가정 출신이거나 눈앞이 온통 불바다가 된 경험을 겪은 사람에게는 ‘색채’가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색채는 생명 그 자체이며, ‘청순미학’은 그런 역사의 부정적 유산까지 담아낸 건강한 예술품인 것이다.
맺음말
청순이 죽은 지 7년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도내 명화좌 등에서는 그의 작품의 리바이벌 상영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영상 기술이 이토록 발달한 시대에,
겨우 흑백영화에 색을 입히기 시작한 정도의 시대의 영화가 계속 상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카메라와 렌즈의 질도 나쁘고, 영상의 질도 형편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지고이네르바이젠’ 재상영 때 등에는 티켓이 순식간에 매진됐다. 심지어는 입석 관객까지 나왔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발산하는 극채색이 테크놀로지 등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생의 심연에서 기어나온 색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 절실함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희귀한 영화 선인이 가져온 극채색은 차젤과 같은 신예 크리에이터들에게 꾸준히 계승되고 있다. 영화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 면면히 이어지는 생명의 불빛이 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출처
스즈키 세이순 Wikipedia
키네마旬報 추모 영화감독 스즈키 세이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