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사와세이와지박령

Culture

2024년 6월 영화 ‘뱀의 길’이 공개됐다. 시바사키 코우라는, 일본 대표하는 여배우가 주연이라고 하는 것도 있어, 영화 팬계 쿠마에서는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또한 감독인 구로사와 세이의 셀프 오마주 작품이라는 측면도 겸비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우리 쿠로사와 영화의 애호가에게는, 그 불후의 명작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손에 의해 패러디화된다고는, 이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그런데 쿠로사와 세이는 지박령에 매료된 영상 작가이다.

그의 영상 작품에는 다양한 유형의 지박령이 등장한다. 검은 얼룩이 되어 벽에 고착하는 지박령이나 자살을 완수한 집을 방황하는 지박령 등이 나온다. 그가 공포 영화의 집으로 이름을 붙인 것도, 후술하지만, 이 지박령의 연출의 뛰어난 일이 일약 사고 있는 곳도, 많이 있을 것이다. 야쿠자에게 청춘, SF, 스파이 등 다양한 영상을 세상에 내놓고 있는 쿠로사와이지만, 이른바 재패니즈 호러의 깃발로서 각광을 계속 받고 있는 것도, 그 유령 연출의 참신함, 그 중에서도 특히, 땅 박령을 그리는 방법의 묘에 의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런 쿠로사와적 지박령이지만, 과거에 실은 더 이상 ‘등장’조차 시키지 않고 ‘연출’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 그 영화야말로, 상기의 「뱀의 길」의 오리지날판이다. 처음으로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언어화할 수 없는 섬뜩함에, 시종 가슴이 거칠어져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스토리만을 쫓자, 단순한 바이오렌스 영화에도 분별하는 내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 불안, 불쾌, 공포,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끓어오르고 왔다. 그것이 이번 셀프 오마주 작품의 공개에 따라 다시 관람해 “아아, 이것은 지박령의 영화였던 것이다”라고 깨닫게 되었다.

「등장」시키지 않고 「연출」한 지박령이란, 도대체 무슨 일일까.

또 왜 그는 지박령이라는 존재에 고집하는지,

지박령이라는 개념에 쏟아지는 그의 메시지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번 블로그에서는 이러한 의문을 밝혀내고 싶다.

쿠로사와 키요란?

1955년 <쇼와 30년> 7월 19일

일본 영화 감독, 각본가, 영화 비평가, 소설가.

1981년 「시가라미 학원」이 피아 필름 페스티벌에 입선. 아이메 신지 감독작에 조감독으로 종사한 뒤 ‘간다가와 음란전쟁’(83)에서 장편감독 데뷔를 한다. 「도레미파딸의 피는 소란다」(85)나 「지옥의 경비원」(91) 등으로 팬을 획득.

1992년 오리지널 각본 ‘카리스마’에서 미국 선댄스 인스티튜트의 스칼라십을 획득, 도미(동작은 99년에 제작, 2000년에 공개되었다). 귀국 후에는 애가와 쇼 주연의 「멋대로 해라!!」시리즈(95~96) 등으로 메가폰을 취한다.

1997년의 「CURE」로 세계에 주목된다. 이후, “회로”(01), “아카루이미라이”(02) 등이 칸 국제영화제에 출품. ‘도펠겐거’(03) 등 공포 작품을 많이 찍고 있었지만, 홈 드라마라는 신경지에 도전한 ‘도쿄소나타’(08)에서 칸 영화제·‘어느 시점’ 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최근의 작품에 연속 드라마 「속죄」(12)나 영화 「리얼 완전한 수장룡의 날」(13) 등.

2015년 아사노 타다노부·후카츠 에리 주연의 ‘기시바베의 여행’이 제68회 칸 국제영화제 ‘어느 시점’ 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제33회 카와키타상을 수상했다.

2016년 처음 다룬 해외 작품 ‘다게레오타입의 여자'(원제: La Femme de la Plaque Argentique)가 공개된다. 같은 해 제29회 도쿄국제영화제·SAMURAI상[30], 제58회 매일 예술상을 수상했다.

2020년(영화 2년), 『스파이의 아내〈극장판〉』이 제77회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

지박령이란

지박령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지박령이란, 자신이 죽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자신이 죽은 것을 이해할 수 없거나 하고, 사망했을 때에 있던 토지나 건물 등으로부터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하는 영을 말한다. 또는 그 땅에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 머물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령

일본에 있어서의 심령 붐의 제일인자, 나카오카 슌야의 조어라고 하며, 최근에는 일부 일본의 국어 사전에도 게재되고 있는 것 같다. 전쟁·사고·재해 등으로 돌발적으로 죽은 사람은 좀처럼 자신이 죽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또 원한과 증오의 감정을 가지고 죽은 자도 그러한 악감정이 재앙하고 언제까지나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자살자도, 자신은 죽었을 생각이었는데 실제로는 죽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고 몇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한다. 이런 영들은 ‘죽음의 자각’을 가질 때까지 몇 달, 몇 년, 수백년과 시간이 걸리고, 그때까지 계속 지박령으로서 지상 가까이에 머물게 되는 것 같다.

과연, 쿠로사와 영화의 지박령도 위의 조건에 해당하는 것 같다. 그의 영화 속에도 이러한 전형적인 지박령도 몇 가지 등장하는 작품이 있다. 그러나 또 동시에 이런 클래식한 형태에서 일탈한 지박령도 많이 볼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지박령일까. 아래, 그의 실제 작품에 다가가면서 분석해 나가자.

『회로』의 지박령

2001년 일본 공포 영화이다. 개요로서는 아래와 같다.

인터넷에 나타나는 기괴한 사이트. 거기에 비치는 사람 그림자는 이 세상을 방황하자 망자인가… 할리우드적인 쇼킹 씬은 적지만, 자연광으로 촬영된 희미한 화면, 주인공들의 주위에서 설명 없이 차례차례로 일어나는 기묘한 사건이라는, 부조리성조차 느끼게 하는 영상과 스토리가, 미지의 공포에 관객을 두드려 나간다.

등장 인물들은 차례차례로 인터넷을 통해 유령에 습격되어 지박령으로 되어 버린다.

이 연출 표현에서 특징적이었던 것은 지박령을 ‘검은 얼룩’으로 그린 ​​점이었다. ‘생’에 대한 집착이 있는 이들은 유령에 습격당한 직후 마치 그 공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기미가 된다. 그 얼룩은 마치 사람의 그림자 같고 끔찍하다.

작중에서 하나, 흥미로운 대사가 있었다. 인터넷의 유령에 관심이 있는 등장인물의 카라사와가 사건의 일련의 소동을 근거로 발한 말이다.

「유령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반대로 영원히 살려고 한다. 몰래 외로움에 갇혀서」

이 말은 나에게 자신의 유령에 대한 이해에서 완전히 푸른 하늘의 참깨였다. 그동안 나 속에서 ​​유령이라는 개념은 달 같은 의미로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죽음의 권화이며 사람을 공포에 빠지는 것이고 때로는 그 원한, 회한의 초월한 힘으로 생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러한 존재였다. 그러나, 등장 인물의 카라사와 야스시, 유령과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한다. 이 영화의 경우 유령은 인간의 ‘생’에 대한 집착심을 초대하는 물에 존재 자체를 벽에 고정시켜 버린다. 「생」에의 집착은, 「죽음」이라고 하는 자연의 흐름으로부터 일탈한, 단순한 도피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검은 얼룩’이라는 끔찍한 귀결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동식물처럼 본능적으로 ‘죽음’을 회피하는 것과 인간의 ‘생’에 대한 집착은 비슷하게 보인다. 우리 인간은 이성을 가지는 것에 의해 「죽음」을 개념화·공유해 버렸다. 생자의 수만큼 「죽음」이 있어, 그것도 또한 다양한 형태로 방문하는 것을, 우리는 말, 그림, 소리, 영상,으로 머리에 두드려 버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죽음’에 겁을 먹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죽음’의 외로움을 망상하고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처럼 사람과 연결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쿠로사와는 「인터넷에 머무는 유령」이라고 하는 설정을 넣은 것일지도 모른다. 인터넷이란, 「죽음」의 개념을 전파시키는 툴이기도 하고, 가초의 커뮤니케이션을 주어 주는, 양의적인 존재이다.

어쨌든, ‘죽음’에 대한 두려움 = ‘생’에 대한 집착은 인류에게만 주어 버린 고개와 같으며, 또한이 영화의 검은 얼룩 = 지박령이란 과도한 「생」에 대한 욕망이며, 그것의 외로운 성취의 끝인 것이다. 더럽고, 움직일 수 없고, 단지 영원히 거기에 서있는 것만의 존재. 이것이 아마 쿠로사와 세이가 지박령이라는 캐릭터에 담은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해석에 도착했을 때, 「죽음」과는 또 다른, 새로운 지옥의 관념을 손에 넣은 마음이었다.

「다게레오타입의 여자」에 있어서의 지박령

2016년 프랑스·벨기에·일본 합작의 연애 공포 영화이다. 다게레오타입이라는 170년 전 사진 촬영의 기법을 중심으로 거기에 고집하는 사진가 스테판과 그 딸과 주인공이 유령이나 연애에 위협받으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이 영화에서 지박령은 그 사진가의 아내이다. 한때 다게레오타입(피사체를 몇 시간 고정하는 태고의 촬영기계)의 피사체로 계속해서 정신을 미치게 자살했다(남편 스테판이 그녀를 고정하기 위해 근육 이완제를 마시고 있거나 했다). 그녀는 죽은 후 남편에 대한 원한 괴로움으로부터 지박령으로 되어 저택 안을 방황하게 되었다.

그러나 징계없는 스테판은 이번에는 딸을 피사체로 계승시켜 다게레오타입 촬영을 계속했다. 물론 딸은 거기에 저항을 나타내고 드디어 이사를 결의. 그러나 그것을 받아 들일 수없는 스테판은 그녀를 계단에서 찢어 죽인다 (직접적으로 그렇게 그려진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스스로의 손에 의해 잃은 스테판은 아내의 유령에게 저주받도록 자살한다.

이 영화의 특징적인 것이 다게레오타입이라는 아이템과 지박령을 융합시킨 점이다. 사진이란 어떤 삶의 시점을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욕망에 다르지 않지만, 그것은 즉 ‘회로’에서 지박령이 된 등장 인물들과 같이 ‘생’에 대한 집착 그 자체 그럼 아닐까. 다른 점은,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타자이다, 라고 하는 곳과, 그 「생」이 어디까지나 자의적으로, 다게레오타입=촬영 기계라고 하는 아이템으로 잘라지고 있다, 라고 하는 곳이다. 사진은 촬영자의 “이상의 형태”로서만 존재하며, 즉 에고이즘의 덩어리이다. 「회로」의 장에서도 말했지만, 「생」에의 집착은 반자연적이며, 하물며 근친자인 아내나 딸이라고 하는 타자를, 단순한 소재로서 이용해, 에고이스틱에 「이상의 생」 을 만들어내는 수수께끼, 언어도단이다. 자연의 흐름에서 벗어난 단순한 도피 행동에는 물론 벌이 수반된다. ‘회로’의 경우가 ‘검은 시미화’였던 것처럼 ‘다게레오타입의 여자’에서는 다른 근친자의 지박 영화·습격이라는 벌이었다.

“뱀의 길”에서 지박령

1998년. 어린 딸을 죽인 남자와 그에게 손을 빌려준 수수께끼의 남자가 펼치는 복수극을 그린 바이오렌스 드라마.

주인공 미야시타는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을 찾고 있으며, 신지마라는 정체 불명의 남자(평소에는 수학의 학원 강사를 하고 있다)가 거기에 손을 빌려준다. 야쿠자를 잡고 창고에 납치 감금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은 범인이 아니다”라고 한다. 실제로 미야시타의 딸에게 손을 내린 범인이 누구였는지는 끝까지 확실하지 않지만, 실은 그 야쿠자들은 조직에서 스너프 필름을 촬영·판매하고 있었다. 그것도 있어, 미야시타와 신지마는 야쿠자를 차례차례로 죽여 가, 드디어 아지트에게까지 맡긴다. 그래서 신지마는 미야시타에게 “내 딸도 여기서 죽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실은 미야시타는 원래 조직의 일원으로, 그 비디오의 판매계였던 것이 거기서 판명한다. 즉 이 이야기는, 신지마의, 미야시타를 포함한 복수극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위 두 작품과 달리 지박령 자체는 등장하지 않는다. 캐릭터로서 「등장」시키는 일 없이, 무려 그 「촬영 수법」에 의해, 지박령의 존재를 시사하고 있다. 알기 쉬운 것은 감금장에서의 1 장면이다. 수갑에 연결된 야쿠자의 오츠키와 미야시타는 다른 방에 있으며, 그들을 비추기 위해 카메라는 자율 운동한다.

이 이미지는 구속 된 오오츠키를 비친 후 뒤쪽에있는 미야시타를 비추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입니다. 그리고 아마 카메라는 소지의 것으로, 손떨림이 느껴진다. 이것에 대해, 블로그상에서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던 언설을 발견했다(글쓴이의 이름은 Nest). 아래에 그 일부를 발췌한다.

카메라는 오오츠키에서 시선을 벗어났다. 끊어진 것이다. 양자의 성질의 차이를 고려하면, 후자에게 오츠키를 버리겠다는 의사를 느끼지 않고는 있을 없다. 지금까지도 카메라는 자율성을 어둡게 주장해 왔지만, 카메라는 어디까지나 대상이 되는 인물을 쫓기 위한 움직임, 동선에 따른 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샷은 위치가 불변인 사람, 오츠키와 미야시타를 같은 샷에 넣으려고 카메라가 능동적으로 이동한 결과이다. 단순히 자율적이거나, 그리고 신체적인 이상으로, 의사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적인 것이다. 누구의 대리도 아니고, 혼자로 움직이는 카메라. 무기적이고, 이야기 세계내에 있어서는 되는 카메라라는 기구가, 등장 인물·관객과는 별개의 행동 원리를 취하는 것. 전율하는 순간을 카메라가 영상으로 포착하고 있다. 그것은 소름 끼치는 미소 짓는 미야시타의 무서움과는 다른 위상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관객은 땅에 붙은 카메라의 거동의 무서움을 누군가에게 묶는 것, 환원할 없는 것이다. 자율해 버린 카메라는 수동적인 기록장치인 것도 인간의 대리인 것도 그만두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확실히 「있는 것이, 영상에 각인된 요동에 의해 나타내지고 있다. 위와 같이 잡을 곳이 없는 카메라에 오츠키가 편의를 호소한 곳에서 무엇이 이루어질까. 카메라는 단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오츠키를 구속으로부터 풀거나, 미야시타에 일시적 해방을 촉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츠키와 미야시타 사이에 위치한 카메라는 중개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3자적인 자율적인 존재이며 말을 통하지 않는 기계이다. 계속 호소하는 오오츠키를 버리고, 기이한 미야시타에 호기심을 돌리는 타인행의적인 잔혹함밖에, 카메라는 가지고 있지 않다. 오츠키는 미야시타와 카메라 쌍방에서 응답되지 않는다는 이중 소외감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감금되고 있는 오츠키의 공포──떨어져 무시되는 공포──버리는 측의 시점으로부터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관객에게는 오오츠키에 대한 카메라의 잔혹한 처치에 간섭하는 방법은 없고, 단지 수밖에 없다. 이상한 사태를 태연하게 보여지고 있는 것, 사실에 관객도 공포하고 전율하는 것이다.

나는 이 언설을 읽고 끝났을 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느꼈다, 그 언어화할 수 없는 소름 끼치는 원인은 이것이었는가”라고 혼자 무릎을 꿇었다.

또, 이 기사의 집필자 Nest가, 이렇게까지 단언하는 것도, 분명히 촬영자·감독은 장면에 의해서 카메라의 움직임을 구분하고 있어, 이 「자율 운동하는 카메라」도 의도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일을 간파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증거로, 예를 들면 단순한 상황 설명의 장면 등은 고정 카메라로 무기질의 슬라이드로 시종하고 있다.

그리고 영상작가 사사키 유스케는 손떨림 영상을 ‘지박령’이라고 부른다.

지박령의 영상은, 소지 카메라에 의한 손떨림 영상이기 때문에 당연히, 삼각의 기구에는 의거하고 있지 않다. 카메라 워크는, 몸통의 회전이나 팔의 가동역 촬영자의 신체의 구조에 근거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지박령의 영상에 있어서는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는 것은 전제도 아무것도 아니고 오히려 예외적인 상태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흔들리는 카메라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세계는 결코 정지하지 않고, 지면은 항상 이미 흔들리고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사상이 있다. 지박령의 영상은 <흔들리는 카메라>영화에 사는 것이다.

그래, 즉 이 『뱀의 길』에 있어서의 지박령이란, 카메라였던 것이다. 나도 감상중, 거듭되는 ‘흔들리는 영상’에 마음은 불안과 자극이 혼교한 것 같은 불쾌한 감정에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라고 해도 무언가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감정은 무의식하에 억압되어 뇌는 단지 눈앞의 이야기상의 교환을 쫓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실제로는, 나는 아마, 그 카메라에 「의사」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어, 그러나 그것이, 고문을 받는 오오츠키를 평연하게 버리는 움직임이었기 때문에, 참지 않고 불쾌감을 개최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리고 다음에 의문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럼 그 지박령의 정체는 누구야, 라고 하는 것이겠지만, 무론, 작중에서는 그런 곳에 언급하고 있는 장면은 없다. 제 생각에 그 정체는 지금까지 신지마가 죽여 온 인물들이 아닐까. 아마 신지마는 지금까지도 그 창고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살인의 작업에서 너무 짜증났다. 단지 학원 강사로는, 너무 수제가 좋고, 무엇보다 냉정 침착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야쿠자들에게 딸을 죽인 입장이라면 지금까지도 그 복수의 일환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죽은 사람으로서는, 예의 스너프 필름의 제작, 판매의 관계자일 가능성도 있다. 또 신지마는 감금장의 창고를 가리키며 “여기의 목소리는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등 여전히 같은 장면에 조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말도 토하고 있다.

그런 신지마에 살해된 범죄자들이 원한이야말로 솔직하게 가질 수 없고(신지마의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니까) 있다. 또 혹은, 「빨리 이쪽 쪽에 가라」라고 하는 시선조차, 거기에는 짜넣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쿠로사와 키요시에게 지박령

왜 그는 이렇게까지 지박령을 계속 그리는가?

우선 하나 올릴 수 있다면, 쿠로사와 키요라는 인간이 가지는, 어떤 종류의 철학의 제시, 라고 하면 코로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람이 가진 “생”에 대한 고집을 가장 하비한 정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의 ‘거미의 눈동자’라는 영화 속에서 화석 채굴에 근무하는 야쿠자의 친옥이 나오는데, 그는 화석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녀석들, 새로운 삶의 방법을 발견했어」

「허무는 불행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 후에 배신당하고 죽인다. 그 채굴장에서 권총으로 쏘인 무잔한 최후였다. 그 묘사를 넣은 것은 즉, 이 야쿠자의 친옥적인 정신에 대한, 비판적인 메세지를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화석은 아마 쿠로사와 세이에게서 하면, 「생」에의 고착에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닐까. 본래라면 생명은 말하자면 “죽음”을 받아들여 제대로 흙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 거미의 눈동자』에서는 주인공이 죽여 흙에 묻었을 남자가 라스트가 되어 휠체어를 타고 등장해 온다. 주인공이 당황하고 매장한 장소를 보러 가면 구멍에서 기어 나온 듯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마지막으로 남자는 척수가 손상되었거나 뭔가로 휠체어를 타고 여성에게 운반되고 있지만 눈이 허무하다. 정상적인 의식이 있는지 여부도 모른다. 그 모습은 꽤 처참하고 아프다. 그도 또,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생」에 고착한 것에 의한 허무에 빠졌다는 것일 것이다.

즉 쿠로사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생’에 대한 고집을 비판하고 그 메시지를 전하는 아이템으로 지박령이라는 ‘최악의 착지점’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지박령을 그리는 이유이지만, 그것은 그가, 인류에게 갖추어지는 가장 보편적인 감정을, 「불안」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살다’라는 행위는 즉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불안이 붙는 것이다. 때때로 사람은 기쁨, 애정, 쾌락, 그러한 감정을 만나는 것으로, 「불안」을 유야 무야로 시키는 일이 있다. 그래도 근본적으로 자는 것은 ‘결국 언젠가는 죽는다’는 닦지 못한 ‘불안’이라는 감정이다. 이 감각은 ​​즉, 인류만이 가지는, 「죽음」을 개념화시켜, 자신의 「미래」에 적용시키는 예지 능력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흥미로운 것이, 이 개념화·예지 능력을 이용해, 우리는 「진역」의 상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만약 영원히 죽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하자”

라고 하는 상정이다. 불로불사를 다루는 이야기는 엄청난 수가 존재하지만, 과연 지금까지 그것이 긍정적으로 그려진 이야기가 있었을까.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학 작품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사카야의 여주인은 불사를 추구하는 길가메쉬에 “불로 불사가 되어도 행복할 수 없다”고 설해, 다케토리 이야기로 카구야 공주는 불로 불사이다 천인이 되는 것으로, 「마음이 없어져 버린다」라고 눈물한다. 「시간」에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에, 일거수일 투족의 행위에도, 의미를 찾아낼 수 없게 된다(앞으로 수십년 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든 오늘도 노력하는 것이다). 거기에 있는 것은, 단지 「허무」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로불사=영원한 「생」에 대한 허무감. 닮지 않은 이 두 가지 감정, 개념이 ‘불안’이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불안」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것이고, 모든 행동 원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쿠로사와는 이 두 가지 감정을 지박령이라는 존재를 이용해 지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박령은 죽음과 불로불사를 동시에 맡고 있는 존재이다. 죽어도 여전히 죽을 수 없는, 앰비버런트한 존재이며, 사람에게 공포와 허무감을 안겨, 무의식하에 잠자는 「불안」의 개념을 단번에 표출시키는, 무서운 캐릭터인 것이다.

★本博客作者:Ricky★

说到文化问题,就交给我们吧!日本文化的传播者Ricky,带你变身日本宅男!

출처

쿠로사와 키요 Wikipedia

黒沢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note.com/art_critique/n/n598c1eb6e87e

· https://nsthtn.hatenablog.com/entry/2024/06/16/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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